복수에는 이자가 붙는다 70화 <테런의 품에서>(70/200)
70화 <테런의 품에서>
2023.10.09.
레아는 성마른 욕정에 이글거리는 테런의 눈과 드넓은 어깨를 보는 순간, 오늘 밤은 빠져나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왠지 테런의 계략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거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가? 더는 구차한 변명 따윈 필요 없겠지.”
테런이 레아의 슈미즈[속옷의 일종]를 벗기려 했다.
“아뇨, 그 전에 저는 변명을 좀 들어야겠어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레아는 격앙된 어조로 물었다. 테런과의 보이지 않는 게임에서 패배한 기분이었다.
쉽게 말해 테런에게 놀아났다는 느낌이랄까.
“음, 오지랖 넓은 나의 약혼녀를 말려야 했거든.”
테런은 팔짱을 낀 채 말을 시작했다.
상의를 입지 않은 맨몸과 헝클어져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한쪽 눈을 가린 모습이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말……려요? 저를요?”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여자들만의 계획을 어떻게 알고 개입한 건지 궁금했다.
테런은 순진한 얼굴로 되묻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사실 여자들이 모여서 작당 모의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임스, 그레이스와 무슨 대화를 나눴지?]
[제게 이걸 주시면서, 공작님께 온 연서를 달라고 하시더군요.]
[연서?]
그런 게 있었던가? 아! 에밀리인가 하는 여자에게서 꾸준히 편지가 오긴 했었다.
단 한 번도 뜯어 읽어 보진 않았다. 이후로는 제임스가 알아서 처리해서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혹시, 그레이스가 질투하던가?]
은근히 질투해주길 바랐다.
[전혀요.]
[아……! 전혀 아니라고.]
저 혼자 질투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꼴이라니. 그녀에게 꼬이는 남자들을 질투하며 광적으로 반응하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제임스, 연서를 보관하고 있나?]
[예,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양이 꽤 됩니다.]
[다 태워 버려.]
[예?]
[그레이스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아. 오히려 그 일로 추문에 휩싸이게 될 거야.]
테런은 아르망 백작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공작저로 찾아왔을 때, 그녀의 이혼 이야기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르망 백작의 인품이 나쁘진 않지만, 모든 면에서 인색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저기 연서를 뿌려대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잠깐 정신이 나갈 수는 있어도, 그런 관계가 오래 유지될 리 없으니 그녀가 나서서 두 사람 사이에 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사교계에 추잡한 가십거리만 제공할 뿐이었다.
[공작님, 아가씨께는 연서가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안 되지. 나는 그레이스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새빨간 거짓말. 사람 애태우는 토끼[그레이스]를 잡아서 바싹 볶아 먹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동안의 사정을 전해 준 테런은, 결과적으로 연서는 전부 태워서 없앴다고 말했다.
또한 섣불리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아주 뜻밖의 말이 나왔다.
“궁금했어요.”
“뭐가?”
“약혼녀가 뻔히 있는 남자에게 어떤 내용을 썼는지, 사실 질투도 나고.”
‘질투?’
테런은 아차 싶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예전에 비비안을 끌어들여 그 난리를 치지 않아도 그녀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었을 텐데.
“저도 질투할 줄 알아요.”
레아는 뾰로통하게 말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반면 테런은 매사 눈치 없는 자신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으로, 할 말을 잃었다.
아르망 부인의 일을 돕는다는 오지랖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녀는 사실 연서의 내용이 궁금했던 것이다.
이제라도 그녀의 기분을 풀어 줘야 했다.
“나도 뭐라고 쓰여 있는지 몰라. 별로 관심도 없고.”
“흥!”
“아르망 부인 일은 내가 유능한 변호사를 소개해 주지.”
아무리 달래 봐도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러면 곤란한데…….
그녀가 스스로 제 침대로 오게 하려고 이런 일까지 꾸민 보람이 없었다.
테런은 이불을 살짝 들어 올리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테런의 맨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손으로 그의 살결을 더듬었다.
“!?”
드디어 오늘인가 싶었다. 어차피 그깟 순결[포도알은 순결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어] 따윈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기나 할까?’
비둘기처럼 날아와 사람을 약 올리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다니기도 하고, 거위 깃털처럼 부드럽게 사람의 신경을 간지럽히는 여자.
‘너의 가치를 모르는 여자는 너밖에 없을 거다.’
오늘 밤, 자신의 충만한 사랑으로 그녀의 마음에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심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테런은 풍성한 금발에 손가락을 넣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응?”
그는 고개를 내렸고, 이내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든 그녀를 발견했다.
“젠장!”
잠시 잊고 있었다. 오늘 그녀가 소각장에서 얼마나 힘을 썼는지.
‘이것도 나쁘지 않아.’
테런은 손으로 연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푹 잘 수 있도록, 밤새도록 그의 품 안에서.
‘제임스에게 밖에서 방문을 잠그라고 하길 잘했어.’
원래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녀와 밤새도록 함께 잠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작은 머리를 얹고 자는 그녀를 보며 속삭였다.
“네가 나만 의지했으면 좋겠다. 나 아니면 안 될 정도로.”
테런은 잠든 그녀에게 자신만의 주문을 걸었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살아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내가 얼마나 테런을…….’
잠든 척하던 레아는 속으로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제 가슴에 가득 찬 테런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겁이 날 정도로 좋아요.’
세상에는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도 있는 법이니까.
레아는 좀 더 버티면서 그의 속삭임을 듣고 싶었지만, 고단한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당신 품에서 잠들 수 있어서 행복해요.’
* * *
결국 레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안해요, 마리.”
“아니에요. 오히려 잘됐어요. 그런 남자와 평생 어떻게 살아요. 이제라도 실체를 알았으니 다행이죠.”
“하지만, 마리의 재산은 되찾아 줬어야 했는데.”
레아는 그 점이 가장 미안했다. 하지만 마리는 그다지 아쉬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공작님께서 유능한 변호사를 소개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네, 저도 들었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오히려 아쉬워한 사람은 레아였다. 남의 남자를 빼앗은 에밀리에게 통쾌하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 되었다.
‘마리의 말이 맞아. 그런 남자는 버리는 게 답이지.’
어쩌면 에밀리가 마리의 인생을 구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레아는 마리와 소냐를 데리고 시내에 있는 채네르의 공방을 방문하기로 했다.
알렌의 여동생 리베트가 의뢰한 드레스가 완성되었다고 하니, 확인할 겸 외출 준비를 했다.
테런은 레아가 공방에 간다는 말에 사륜마차를 내주었다.
그런데 그는 요즘 무슨 일을 하는지, 매일같이 황실 고위 관계자들이 공작저를 드나들었다.
‘무슨 일이지?’
궁금하긴 했지만, 저처럼 한심한 일에 관여할 테런이 아니기에 의구심을 접기로 했다. 마침내 세 사람은 공방에 도착했다.
“언니!”
“아가씨!”
레아가 방문하자 채네르와 폴린이 매우 반갑게 맞이했다. 톰과 폴 역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했다.
“공방이 정말 예쁘네.”
레아는 공방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부티크 같아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쯤은 공방 앞에 멈춰 서서 구경하곤 했다.
“채네르, 리베트 양의 드레스가 완성됐다면서?”
“응. 저기 있어.”
채네르는 드레스가 있는 곳으로 모두를 안내했다.
그중에서 가장 긴장한 사람은 단연 소냐였다.
그녀 역시 또 한 명의 황태자비 후보의 드레스를 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채네르의 드레스를 보게 된 것이다.
“세상에! 큰일 났네.”
레아의 입에서 감탄과 우려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채네르가 만든 레이스 드레스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리베트가 저 드레스를 입고 간택[황태자비로 선택됨]되면 큰일이니까. 반면 마리와 소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갸웃거렸다.
“왜 그래? 드레스에 문제라도 있어?”
레아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저 드레스, 채네르가 직접 디자인한 건가요? 아니면 의뢰받은 대로 제작한 건가요?”
마리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채네르가 대답했다.
“만들어 달라는 대로 해 줬는데?”
채네르는 리베트가 보낸 디자인 도안을 마리와 소냐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채네르를 칭찬했다.
“최고예요. 그러니 절대 싸게 팔지 말아요.”
“싸게 안 팔 건데.”
반면 레아는 마리와 소냐의 속내가 궁금했다.
어째서 두 사람이 동시에 드레스를 보고 난색을 보이는 걸까? 물론 웨딩드레스 같다는 건 자신도 알고 있었다.
리베트가 순백의 여신처럼 보이고 싶어 했으니까.
“예전에 테레사 황제께서 결혼할 때 입으셨던 드레스와 똑같습니다.”
마리가 충격적인 말을 했다.
“맞아요. 테레사 황제의 드레스라고 해도 믿을 정도예요.”
소냐 역시 테레사 황제가 결혼할 당시 생테부르크 황제 부부와 함께 갈덴시아를 방문했었다고 말했다.
“리베트 양이 머리를 아주 잘 썼네요.”
레아는 그 이유가 가장 궁금했다.
“보는 이에게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할 테니, 모두 감동하겠지요.”
소냐는 담담한 어조로 당시의 이야기를 전했다.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저 드레스는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소냐의 말에 레아는 크게 당황했다. 사실 자신은 리베트가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리베트가 황태자비라도 된 듯 행동하는 모습이 오히려 독이 될 거라고 여겼는데, 완전히 빗나갔다.
“소냐, 당시에 황제께서 그 드레스를 마음에 들어 하셨나요?”
“그럼요. 그때는 두창[마마, 천연두]에 걸리기 전이라 얼마나 아름다우셨는데요.”
‘이 일을 어쩌지? 내가 너무 자만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