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에는 이자가 붙는다 88화 <믿고 기다리는 마음>(88/200)
88화 <믿고 기다리는 마음>
2023.10.27.
리베트는 아침 식사도 거른 채 몹시 들떠 있었다. 그녀는 알렌과 그의 정부(情婦)인 에밀리가 함께 식사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오빠, 11시에 제 드레스가 도착한대요.”
“알고 있어.”
알렌은 내심 그레이스가 와 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잠깐, 사라는 어디 가고 둘만 식사해요?”
리베트는 사라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 그 하녀는 곧 집을 나갈 거야.”
에밀리가 당황해하는 알렌을 대신해 대답했다.
“그렇구나.”
사실 리베트는 알렌이 누구를 애인으로 삼든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에밀리에게 도움을 받을 일이 생겼다.
“오빠, 간택 연회[황태자비 후보를 뽑는 연회]에 에밀리가 제 시중을 들어주면 어때요? 소문을 들어보니 다른 영애들은 시녀도 귀족 출신으로 골라서 데려온대요.”
리베트의 말에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제국의 황태자비를 뽑는 연회이니, 시중드는 사람 한 명까지 소홀히 고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밀리가 해주면 되겠네?”
알렌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에밀리는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조용히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기꺼이 해야죠. 그런 자리에 아무나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머! 고마워요. 역시 같은 귀족끼리는 말이 통한다니까.”
리베트는 에밀리의 손을 꼭 잡으며 웃었다. 알렌 또한 에밀리를 정부로 들인 것이 정말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쳐선 안 되지.’
황궁 연회는 운이 좋아야 갈 수 있는 곳인데다가, 귀족 남자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무엇보다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까.
‘또 알아? 리베트가 아니라 황태자가 나한테 반할 수도 있잖아?’
에밀리는 자신의 외모가 리베트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에밀리,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알렌은 기분이 좋은 듯 인심을 쓰는 투로 말했다.
“알렌이 제 곁에 있는데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어요.”
나긋나긋한 에밀리의 말에 알렌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사람은 근본이 중요하다. 매사 따지고 확인하며 귀찮게 굴던 사라와는 차원이 다른 여자였다.
“나는 드레스가 오기 전에 우유 목욕이라도 해야겠어요.”
리베트는 신이 나서 식당을 나갔다.
‘모든 일이 아주 순조로워.’
알렌은 왠지 모르게 좋은 예감이 들었다. 리베트만 황태자비로 간택되면 제 인생은 완벽해질 터였다.
‘황태자비 가문이 되면 적어도 공작 작위는 내려주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테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비록 나라는 다르지만 작위에서 밀려 짜증이 났었는데, 이번 기회에 테런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터였다.
두 시간쯤 지나자, 리베트가 그토록 기다리던 드레스가 도착했다.
알렌은 회사에도 나가지 않은 채 그레이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드레스를 가져온 사람은 그레이스의 시녀와 다른 직원이었다.
“맥도웰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폴린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 폴린 양 아닌가요?”
“네, 맞아요. 리베트 아가씨께 드레스를 입혀 드린 뒤에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저희 아가씨께서 전하라는 서류가 있어서요.”
“그러시죠.”
“그리고 여기는 그레이스 아가씨의 샤프롱[귀족 아가씨의 보호자 겸 동반자] 마리 세루티 부인이세요.”
“안녕하세요? 맥도웰 사장님.”
마리는 알렌과 함께 서 있는 에밀리를 보고 경악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왜냐하면 자신을 본 에밀리가 더 놀란 눈치였기 때문이다.
제 남편과 결혼한 줄 알았더니, 알렌의 정부가 되어 있을 줄이야. 아무래도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게 되었다.
“반갑습니다, 세루티 부인. 그런데 이름이 왠지 익숙하군요.”
알렌은 친절하게 대했다.
반면 그의 곁에 있던 에밀리는 얼굴이 창백해지다 못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낌새가 이상해 에밀리를 쳐다봤다. 그리고 에밀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곳에 마리 세루티 부인이 서 있었다. 시종일관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나 태도가 일반 시녀와는 확연히 달랐다.
“에밀리, 아는 분인가?”
“아뇨, 처음 뵙……는 분이에요.”
에밀리가 불안한 듯 대답하는 중에, 다행히 리베트가 요란스럽게 등장했다.
“꺅! 드디어 내 드레스가 도착한 거예요?”
얼마나 소란스러운지 알렌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리베트는 폴린과 마리를 드레스 룸으로 안내했다.
그 뒤로 시종들이 드레스와 장신구 상자를 분주히 날랐다.
* * *
레아와 테런은 웰링턴 백작 남매를 맞이했다.
그의 말대로 백작 남매는 매우 검소하고 소탈했다. 경제 사정이 넉넉지 않다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몰락한 귀족 영애가 지참금 없이 결혼할 방법으로는 간택에 응하는 것이 최선이긴 하다. 하지만 레아는 아델을 보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후! 이 일을 어쩌나.’
수수하고 평범한 외모는 그렇다 쳐도 두꺼운 안경까지 쓰고 있으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소냐가 보면 기겁할 텐데.
“그레이스, 나는 아서와 이야기를 나눌 테니…….”
“걱정 마세요. 웰링턴 영애는 그동안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을 테니까요.”
“잘 부탁드립니다, 비자크 영애.”
아델의 오라비인 아서가 감사의 인사를 건넸고, 레아는 품위 있는 미소로 화답했다.
레아는 아델을 데리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웰링턴 영애, 저는 그레이스 비자크라고 합니다.”
“편하게 아델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럴까요?”
“저, 그레이스처럼 아름다운 분은 처음 뵙습니다. 여자가 봐도 반할 만큼 아름다우세요.”
책을 가슴에 꼭 안은 아델은 레아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안경 너머로 슬쩍슬쩍 쳐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레이스를 보고 오필리어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답니다.”
“네? 오필리어요?”
《햄릿》의 오필리어를 말하는 건가. 비극적인 인물로 알고 있는데.
책벌레라고 하더니 모든 사람을 책 속의 등장인물에 투영하는 버릇이 있는 듯했다.
“아델, 그 안경을 벗으면 혹시 앞이 잘 안 보이나요?”
레아에게는 당장 닥친 현실적인 문제가 더 중요했다.
“아뇨, 책을 읽을 때만 써요. 생활하는 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간택 연회에 안경을 쓰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레아는 자신감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외모만 보고 황태자비를 뽑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재 상태로는 리베트의 압승이었다.
‘안 돼, 아델에게 숨겨진 매력이 있을 거야.’
책을 많이 읽었으니 지적이고 언변이 뛰어나거나, 학식이 깊어 현명한 사고를 하는 숙녀일 것이다.
‘예쁜 여자만 황태자비가 된다면 애초에 간택 연회는 필요도 없지.’
레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최선을 다해서 아델이 원하는 대로 품위 있고 우아한 ‘카르멘’을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아델을 본 소냐의 얼굴색이 흑색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반면 아델은 붉은 드레스를 보더니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렸다.
“제가 원했던 바로 그거예요.”
“다……행입니다, 영애.”
소냐는 말을 더듬었다. 이내 그녀는 하녀들을 향해 정신없이 이것저것 지시했다.
“화장품 있는 대로 다 가져오고, 장신구도,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몹시 당황한 듯 두서없이 심부름을 시켰다.
레아는 더 이상 지켜볼 수만 없어 소냐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소냐, 천천히 하나씩 하세요.”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소냐는 생테부르크 황후의 드레스를 만드신 분이세요.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든 황실의 품격에 어울리도록 재창조할 수 있는 분이시죠.”
레아는 눈을 크게 뜨고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때까지 소냐를 격려했다. 그러자 아돌프가 나섰다.
“아가씨, 염려 마십시오. 저희 부부의 손을 거쳐 간 황족이 얼마나 많은데요.”
“두 분만 믿을게요.”
‘리베트가 간택되는 일만은 막아야 하니까요.’
간절하기는 레아도 마찬가지였다.
* * *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레아는 테런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작은 정원을 산책했다.
“제가 소냐를 도와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레아의 머릿속은 온통 일 생각뿐이었다.
“그레이스, 자신의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기다려주는 것도 중요해.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직접 나서서 하나하나 다 지시하고 확인하면 직원들은 그레이스를 신뢰하지 않아.”
레아는 정곡을 찔린 듯 테런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소냐가 하는 일을 일일이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레아, 상단주가 직원들을 믿어주지 않고 매사 의심하면 직원들은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단다.]
아버지도 테런과 똑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왜 그 중요한 이치를 잊고 있었을까.
“테런 말이 옳아요. 제가 경솔했어요.”
“자책하라고 한 말은 아니고, 지휘관과 경영주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한 말이야. 병사들은 자신의 상관이 신뢰를 보여주면 충성을 다하거든.”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네요.”
“쉽지 않지.”
테런은 바람에 흩날리는 레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정리해 주었다.
그녀의 청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으면 묘하게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아서와 대화할 때도 신경은 줄곧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사랑에 빠진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온통 한 사람만 눈에 들어오고, 그녀의 얼굴로 머릿속이 가득 채워지는 현상.
너무 소중해서 아끼고 싶은 마음. 함께라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감정.
그래서 그녀가 도둑들이 들끓는 바젤 숲까지 왔었다는 생각을 하면 심장이 전기에 감전된 듯 짜릿짜릿했다.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마음도 끓어올랐다. 그녀가 사업을 하지 않으면 자신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그레이스, 사업 확장에 그토록 적극적인 이유가 뭐지?”
“네? 그야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성공하고 싶은 열망이 있는 거잖아요.”
“성공? 사업적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건가?”
“그……렇죠.”
“내가 있는데 굳이?”
테런은 의아하게 물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무언가를 꿈꾸고 이루어 나가는 일련의 과정들을 응원했다.
과거에 자신에게만 의존했던 모습과는 달리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에 매력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점점 그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