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1화. 1592 남해전쟁. (21)
쾅! 콰쾅! 쾅!
“또 쏴 대는군!”
“각하! 엎드리십시오!”
“문제는 제국이 정신을 차린 게 너무 빨랐다는 거지….”
과열되었던 포신의 냉각이 끝난 건지, 다시금 맹렬하게 포격을 퍼붓는 제국군에 몸을 웅크리며 중얼거리던 고니시는 갑자기 굳어졌다.
“설마!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게 아니고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우리가 성탄절을 개시일로 잡을 거라 예상하고?”
* * *
일본이 성탄절을 작전 개시일로 잡은 것은, 제국에서 성탄절이 갖는 의미 때문이었다.
제국의 집권 세력인 유학자들은 원칙적으로 무신론자들이었다.
고려 말 불교의 폐해를 직접 보고 겪은 제국의 1세대 유학자들은 종교를 철저히 불신했고, 불교를 강하게 억압했다.
하지만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어져 온 불교의 저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불교의 영향력이 다시 강해지는 것을 감지한 집권층은 대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톨릭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과거, 왕세자 시절 향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선교를 금지당한 가톨릭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가톨릭은 조금씩 퍼져 나가고 있었다.
초반에는 이렇게 퍼진 가톨릭에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를 어찌해야 할까? 억압할까?”
“억압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오. 수도승들이 대놓고 선교한 것이 아니라, ‘학문’으로 연구하다가 넘어간 이들이 대부분이라 그렇소. 명분이 약하오.”
“게다가 선교 금지 이유를 알아서인지 제사도 지내고 있으니….”
“불교도 골치 아픈데 가톨릭이라니….”
이렇게 부정적인 반응이 이어지던 가운데, 바티칸에서 답이 왔다.
-제사는 조상에 대한 추모와 감사를 표하는 행사이니, 계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군.”
“질문을 던지면서 한 약조도 있으니 말이오.”
“하아…. 불교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가톨릭까지….”
바티칸의 대답을 들은 집권층은 ‘선황후신(先皇後神)’이라는 전제 조건을 걸었다. [황제를 먼저 섬기고 그 다음에 신을 섬긴다는 뜻]
-먼저 황제에게 충성할 것을 약조하라.
-황제를 신으로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 제국인이라면 바티칸이 아니라 황제에게 충성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훗날 ‘선국후신(先國後神)’이라고 바뀐, ‘정치 불간섭’을 명문화한 것이었다. [나라를 먼저 섬기고 그 다음에 신을 섬긴다는 뜻]
이미 유럽에서조차 정치 권력을 대부분 상실한 바티칸은 이 조건을 수락했고, 제국은 선교를 허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의 집권층은 가톨릭이 의외로 쓸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교의 세력과 영향력을 빠르게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 [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뜻]
눈엣가시 같았던 불교를 견제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된 제국의 집권층은 은근히 가톨릭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가장 큰 지원은 성탄절을 공식 휴일로 선언한 것이었다.
가톨릭을 믿든 안 믿든, 성탄절은 무조건 쉬게 한 것이다.
물론 불교 세력 쪽에서 나올 불만을 차단하기 위해 석가탄신일도 공식 휴일로 지정했다.
하지만 ‘성탄절(聖誕節)’과 ‘불탄일(佛誕日)’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면서 은근히 차별을 두어 가톨릭을 밀어주었다.
‘일(日)’보다는 ‘절(節)’이 조금 더 격이 높다는 인식을 이용한 차별이었다.
이렇게 되면서 가톨릭과 불교는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며 경쟁하게 되었다.
이 둘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이들은 박수 [무당의 옛말]와 무당들이었다.
* * *
쾅! 콰쾅! 쾅!
“그랬기에 성탄절을 작전 개시일로 삼은 것이었다.”
근처에서 포탄이 터질 때마다 몸을 웅크리면서도 고니시는 계속해서 복기(復棋)했다. [바둑이나 장기에서, 두었던 판국을 다시 처음부터 놓아 봄]
-연합함대의 훈련 일시를 늦췄다. 제국 해군의 긴장도를 성탄절 즈음에 바닥까지 떨어뜨리기 위해서.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아니, 된 것처럼 보였다.
-제주도 기습에서 제국의 제2기동함대는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랬기에 아군은 안심하고 북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땅과 바다에서 얻어터지고 있지. 마치 허를 찔린 것처럼 말이야…. 아니, 허를 찔린 게 맞는 건가?”
지금 상황을 살피며 고니시는 결론에 다다르고 있었다.
“미리 대비하고 있지 않은 이상 나올 수 없는 결과야. 미리 대비하고 있지 않은 이상….”
하지만 여전히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제2기동함대가 당하도록 내버려 뒀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군. 버리는 패로 쓰기에는 제2기동함대의 전력이 너무 커.”
옆에서 고니시의 혼잣말을 듣고 있던 참모 하나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냐, 아냐….”
하지만 고니시는 계속해서 복기에만 매달렸다.
“각…!”
이에 참모가 다시 목소리를 높이려 하자, 다른 참모가 그를 말렸다.
“왜!”
“각하께서 저러시는 건 훗날을 위해서일세.”
“그게 무슨 헛소리야!”
“이미 이번 전쟁은 진 거야….”
“뭐!”
-이미 이번 전쟁은 졌다.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모든 책임을 다 떠맡을 수는 없다.
“…이런 이유일세.”
이유를 들은 참모는 분을 참지 못하고 참호 벽을 주먹으로 쳤다.
“빌어먹을!”
복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 고니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었다. 추후 책임 공방에서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판단에 고니시는 복기를 이어갔다.
“아무리 제국이라도 제2기동함대의 상실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면… 역시 원균인가? 원균이 문제였어.”
고니시는 원균을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했다.
-첩자들이 몰래 입수해 보낸 인사 평가서에 따르면 원균은 맹장(猛將)이라고 했다. 하지만 부하들과 동료들 사이에서 도는 평가는 ‘맹장(盲將)’이었다. 앞뒤 안 가리고 돌진하는 맹목적인 장수라는 비웃음이었다.
-제국 해군 내부의 파벌 싸움이 만든 결과가 원균의 제2기동함대 사령관 취임이라는 말을 들었다.
“결론을 내리자면….”
마침내 고니시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제국은 함정을 팠고, 일본은 그 함정에 걸린 것이다.
-제국은 원균이 이 정도로 무능할 줄은 몰랐기에 예상보다 큰 초반 피해를 봤다.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일본 해군과 육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일본은 함정에 걸린 피해자다.”
이것이 고니시의 결론이었다.
훗날 이 고니시의 결론을 바탕으로 ‘제주도 공격 유도론’이라는 음모론이 탄생하게 되었다.
주로 일본 학자들이 이를 열심히 주장했고, 제국 학자들은 코웃음을 치는 것으로 응수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그게 함정이었으면 이후 벌어진 ‘유성우(流星雨)’는 뭔데?” [수많은 포탄이 쏟아지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리고 이어진 것은 ‘원균 씹기’였다. [원균을 험담하는 것을 의미]
“원균이 제대로 해서 제주도에서 막기만 했어도! 그러면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나오지도 않았어! 원균이 무능해서 벌어진 일이야!”
* * *
“결론은 나왔고, 이제는 발버둥을 쳐야겠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책을 세운 고니시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거센 제국 육군의 포격을 직접 확인한 고니시는 참모에게 물었다.
“발동정에 실은 대포들은 어떻게 됐나?”
“전부 파괴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제국 놈들의 ‘대(對)포병 포격’에 당한 건가?”
“그렇습니다.”
“아쉽군. 쩝….”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맛을 다신 고니시는 명령을 내렸다.
“해군에 연락해 약속했던 포격 지원을 요청하도록.”
“상륙선에서 끌고 온 통신선이 끊어졌습니다.”
“무선전신기는?”
“가장 먼저 고장이 나 버렸습니다.”
“언제나처럼 엉망이군.”
참모의 대답에 고니시는 고개를 저었다.
* * *
무선전신기는 제국이나 명, 일본과 유럽을 막론하고 그 덩치 때문에 악명이 높았다.
때문에 이동하면서 통신할 수 있다는 획기적인 장점에도 불구하고, 주로 통신망을 건설하기 힘든 오지에 주둔한 군사 기지나 전함처럼 덩치가 큰 군사 장비에나 탑재할 수 있었다.
이에 일본은 획기적인 장비를 만들어 냈다.
무선전신기를 기능별로 분해해 몇 개의 상자에 나눠 담은 것이다.
나중에 이 상자들을 조립해 전원을 연결하면 바로 무선전신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매우 획기적인 장비였지만 일본군 통신병들 사이에서는 ‘도자기 그릇’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최악의 기피 장비로 취급당하고 있었다.
도자기만큼 무겁고 도자기보다 약한 내구성 때문이었다.
훈련에 나가기만 하면 가장 먼저 고장 나는 것이 이 ‘도자기 그릇’이었다.
* * *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건가? 지금 당장 발광 통신기를 이용해 통신을 시도하도록.”
“알겠습니다!”
참모의 명령에 통신병들은 상자에서 발광 통신기를 꺼내 전원을 연결하고는 수송선을 향해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수송선에서 수신 확인 신호를 보냈음에도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일본 전함의 주포가 조용하자, 고니시는 참모를 다그쳤다.
“다시 통신을 보내 봐!”
“알겠습니다!”
몇 번의 재촉 후에 수송선에서 답신이 돌아왔다.
“불가(不可)?”
“불가라고? 이 미친!”
고니시는 소리치며 참모에게 다시 명령했다.
“해군에 다시 연락해! ‘지금 당장 포격 지원 요청! 약속을 지킬 것!’”
“알겠습니다!”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온 답에 고니시는 뒷목을 잡았다.
“‘현재 주포 사용 불가’? 뭐 이런 개 같은!”
욕설을 내뱉은 고니시는 소리쳤다.
“마에다 님은 뭐 하는 건가! 다시 연락해! ‘해군의 지원이 없다면 이번 작전은 필패!’”
“알겠습니다!”
* * *
고니시는 물론이고 가토까지 포격 지원을 요청했지만, 일본 해군의 전함들은 즉각 응할 수 없었다.
제국 해군의 자항화탄정 때문이었다. [스스로 항해하는 화약 탄정을 의미, 현대의 어뢰와 유사]
일본 전함과 순양함들이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얕은 바다였음에도 제국의 자항화탄정은 무리 없이 재빠르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항화탄정에 실린 자항화탄들은 서해와 남해의 얕은 바다에 맞춰 조정된 것들이었다.
자항화탄정을 요격하고 자신들을 노리고 달려오는 자항화탄을 피하느라 일본 해군의 전함과 순양함들은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교활한 제국 놈들!”
기함의 함교에서는 함대 사령관 구키 요시타카가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제국의 자항화탄정들이 가장 먼저 노린 것은 구키가 지휘하는 함대의 구축함들이었다.
구축함 전력을 먼저 무력화시킨 제국의 자항화탄정들은 다음으로 항공모함을 노렸다.
구축함을 잃은 항공모함은 알몸이 된 것과 같은 상황이었고, 제국의 자항화탄정들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침몰까지는 필요 없다. 좌초만 시킬 것.
-좌초도 힘들면 함재기 운용만 불가능하게 만들 것.
이것이 이순신이 일본 항공모함을 상대로 내린 명령이었다.
제국의 자항화탄정들은 이를 충실히 실행했다.
덕분에 일본 연합함대는 구축함 전력에 이어 항공모함 전력도 잃게 되었다.
자항화탄에 명중된 항공모함의 선체가 수평을 잃으면서 함재기 운용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날이 밝으면 제국군의 함재기들이 다시 몰려올 것이 뻔한데, 대공포 외에는 방어할 수단이 하나도 없게 된 것이었다.